끝없는 변혁 (19세기)

‘전통의 단절’은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의 여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 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뜨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수로 보면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 이전 보다 훨씬 많았지만 나름의 양식을 지니지 못하였다. 사업가나 시의원들의 취향에 따라 문은 고딕으로 건물은 노르만 성이나 르네상스 양식으로 해달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작품이 없지는 않았다. 찰스 배리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 <런던의 국회 의사당>은 위엄 있어 보이면서 고딕 장식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이전의 화가들은 다른 직업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제단화나 초상화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고 후원자의 요구에 따라 그리면 되고 지위도 안정적이었다. ‘전통의 단절’은 화가들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될수록 화가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의 간극은 벌어졌다. 후원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들은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며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예술관을 따라서 제안을 거부하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 사이의 골은 깊어져 갔다.

화가들이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이점에는 선택의 폭 확장, 후원자의 변덕에서 벗어났다는 것 이외에 미술이 처음으로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식이 제공하는 선택의 영역은 넓어졌으며 개성 표현 하는 수단도 증가해 왔다. 우리는 누구나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반 델프트가 다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담뱃불을 붙이는 등의 행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듯 우연히 그런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미술이 추구하는 참된 목적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그 밖의 다른 목적들이 모두 포기되었을 때에만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평범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과 만나길 원했다. 그 대상은 바로 남의 것을 모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술적 양심에 부합될 때만 붓을 휘둘렀던 화가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회화사는 이전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기량이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문을 의뢰 받아서 유명해진 미술가들이 그 시대의 지도적인 대가였다. 성공한 화가들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 사이의 구별은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19세기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었다. 19세기의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이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 피렌체,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는 파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기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다비드의 제자인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였다. 그는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을 보면 왜 많은 화가들이 그의 기교를 부러워하고 권위를 존중했는지 알 수 있다. 한편으로 보다 열정적인 화가들이 왜 이런 매끈한 완벽함을 못견뎌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앵그르 반대자들의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아였다.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는 앵그르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명확한 윤곽선이 없으며 빛과 그림자 부분의 색조가 섬세하게 표현된 나체도 없고, 교훈적인 주제도 없다. 단지 역동적인 순간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다.

들라크루아가 진정으로 찬양한 미술가는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였다. 그는 컨스터블처럼 진실하게 현실을 묘사하려으나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진실은 조금 달랐다. 그는 세부 묘사보다는 모티프의 전반적인 형태와 색조에 주력했다.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정원>.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었다. 농부들은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듯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곤 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는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는 극적인 사건도 없고 줄거리도 없다. 농부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목가적인 분위기도 아니다. 밀레는 이들의 건장하고 튼튼한 체격과 신중한 움직임을 강조하는 데 전념했다.

이런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는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 G. 쿠르베 전’이라 불렀다. ‘사실주의’.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는 관전파의 요란한 작품에 익숙한 사람에게 유치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꾸밈 없는 구도는 <이삭 줍는 사람들>의 구성마저 계산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 자기 자신을 셔츠 차림의 부랑아처럼 묘사한 것이 소위 ‘점잖은 화가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평범한 효과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계를 본 그대로 표현하려는 쿠르베의 노력은 미술가들이 인습을 경멸하고 오직 스스로의 예술적 양심만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관전파 미술에 대한 거부가 바르비종 화가들과 쿠르베를 ‘사실주의’로 이끌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라파엘로의 전통을 계승하므로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앙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고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라 불렀다. 그러나 소위 프리미티브 화가들(르네상스 전성기 이전인 15세기의 화가들은 당시 이상하게도 이렇게 불렸다.)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순수해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 자기 모순적이어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프랑스 미술의 세 번째 혁명의 물결(들라쿠르아의 첫 번째 혁명, 쿠르베에 의한 두 번째 파동을 거쳐)은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히 검토하여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모든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장소는 창문이 있어 빛이 들어오는 화실이었으며 둥글고 입체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점차 변화를 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학생들은 고대 조상을 본딴 석고상을 그리면서 명암의 농도에 따라 조심스럽게 입체감을 나타냈다. 일단 이런 방법이 몸에 밴 후에는 모든 물체에 이것을 적용했다. 대중들은 이 방법에 너무 익숙해져서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어둠에서 밝은 부분으로의 그와 같은 변화 과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강렬한 명암 대조가 나타난다. 화실 안에서 처럼 둥글거나 입체감 있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믿고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탈피한다면, 우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네 <발코니>의 확실한 코도 없이 평면적인 얼굴은 확실히 마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지의 소치로 보였을 것이다. 마네와 협력한 화가들 중 클로드 모네가 있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면 겹겹이 덧칠하는 것은 물론, 색채를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칠해나가야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점이 바로 이런 불완전한 마무리였다. 모네와 주변화가들도 ‘살롱 전’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서 따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인상:해돋이>이라는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이 ‘인상주의자’라고 조롱 섞인 어투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딕’, ‘바로크’, ‘매너리즘’ 같은 단어처럼 조롱의 의미는 곧 사라지고 본인들도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평가들을 격분시킨 것은 기법만 아니라 소재에도 있었다. 당시에는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라고 받아들여지는 자연의 한 부분을 묘사하게 되어있었다. 모네 <파리의 생라자르 역>. 인상주의자들은 새로운 원리를 풍경화 뿐 아니라 어디에나 적용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칼레트’의 무도회>. 그들은 인간의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인상주의 전시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작품에 코를 박고서 아무렇게나 그어진 듯한 붓놀림 밖에 못 봤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미유 피사로 <이탈리아 거리, 아침, 햇빛>.

인상주의가 빠르게 승리한 데에는 사진술과 일본 채색 목판화의 역할이 컸다. 사진술이 발달하니 초상화가 심한 타격을 받았고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일본 채색 목판화는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보여주었고 프랑스 화가들은 자신들에게 아직도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남아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드가는 이러한 일본 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동감하였지만 그 그룹과 약간 거리를 두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관심을 가졌고 앵그르를 존경하고 있었다. <앙리 드가와 그의 조카딸 뤼시>에서 그는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 했다. 이것은 또한 그가 왜 발레 장면을 좋아했는지 설명해 준다. 발레 연습 장면을 보면서 드가는 매우 다양한 자세와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신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출연 대기>. 그에게는 인간의 형체에 나타나는 빛과 그늘의 상호 작용과 운동감이나 공간감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했다. 그는 새로운 이념들이 완벽한 소묘 솜씨와 일치하지 않기는 커녕 가장 완전한 구성의 대가만이 극복해낼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아카데미 관례를 고집하는 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조각도 곧 ‘모더니즘’의 찬반 논쟁에 휘말렸다. 오귀스트 로댕은 고전기 미술과 미켈란젤로의 연구자였고 대중적 인기도 누렸음에도 비평가들에게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조각가 쥘 달루>, <신의 손>.

전 세계에서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를 접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밖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미국의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였다. 그는 엄격하게는 인상주의자가 아니었는데 그의 관심사는 빛과 색채보다는 미묘한 색면의 구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오래된 배터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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