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어떤 사람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회화의 규칙들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현대 미술의 시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목적도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진 자연의 발견 이래로 계속 발전해온 미술의 전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 역시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리기를 원했다. 그들이 벌인 논쟁은 그 목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인상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얼마 동안은 시각적 인상의 모방에 목적을 둔 미술의 여러 문제들이 다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문제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폴 세잔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푸생의 작품에서 보이는 조화롭고 평온한 분위기, 균형과 견고함을 추구했다. 과거의 대가들은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서 균형과 견고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눈으로 본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상을 관찰하기보다는 전통적 규범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발견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푸생의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고자 했다. 그의 목적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놀라운 것은 그가 성공했다는 것이다.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프로방스의 산>, <세잔 부인의 초상>, <정물>.

조르주 쇠라는 같은 문제를 수학 방정식 풀듯이 해결하려 했다. 그는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탐구하였고,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의 점묘법은 알아보기 힘들게 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보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묘사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으며, 흥미 있고 표정이 풍부한 색면 구성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쿠르브부아의 다리>.

네덜란드 출신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에 프랑스 아를로 왔다. 그는 아를에 온지 1년도 안되어 정신병자 수용소에 들어갔고 37세에 자살했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도 안되며, 유명한 작품들은 정신적인 위기와 절망으로 작품활동이 힘들었던 마지막 3년 동안에 그려졌다. 고흐의 붓놀림은 그의 격양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흐는 정확한 묘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같은 시기 세잔이 도달했던 것과 비슷한 지점에 세잔과는 전혀 다른 길을 통해서 도달했다. 두 화가는 다 같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물론 이유는 각각 달랐다. 세잔은 정물을 그릴 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할 때에만 이른바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반면에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생트마리 드 라 메르의 풍경>, <아를의 반 고흐의 방>.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제 3의 화가가 1888년 남프랑스에 나타났다. 폴 고갱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사명감 있던 고흐와 달리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고흐는 고갱과 친하게 되길 갈망해서 결국 아를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정신착란을 일으킨 고흐가 고갱에게 달려들어 그들의 우정은 불행하게 끝을 맺었다. 고갱은 날이 갈수록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럽에서 축적되어온 천박한 모든 재능과 지식이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버렸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가는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로 갔다. 그가 타히티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보고 그의 친구들조차 그림의 야만적이고 미개함에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넒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 달리 그는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의 구성으로 인해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함을 느끼고 남양 군도로 영원히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거기서 고독과 절망의 몇 해를 보낸 후 질병과 궁핍에 쓰러져 죽었다. <백일몽>.

이렇게 일부 미술가들은 점차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졌다고 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이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굳건하고 지속적인 형태는 소홀히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즉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 불만을 느꼈다.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 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이 세 가지 운동이 ‘미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막다른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미술가들의 끊임없는 시도로서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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