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시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신교 국가들은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로미니의 <산타 아그네스 성당>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유사한 면이 있지만 곡선이나 바로크적인 것들이 없어서 침착한 인상을 준다.

성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사치로 경쟁하지 않았으며, 18세기 영국의 이상은 교외의 저택이었다.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고전 유적을 연구해서 교과서를 출판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책이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최고의 권위서가 되었고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최신 유행이 되었다.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 <런던 치직 저택>은 고대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곡선도 없고 지붕 위의 조각상이나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로 그림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을 샀지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의뢰하지 않았다. 윌리엄 호가스는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교훈적인 내용의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탕아의 편력>. 그는 이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원화보다는 대중들에게 보급된 판화로 만든 복제품 때문이었다.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등장한다. 그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레조, 티치아노 등이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는 당시 감식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역사화의 우월성을 믿고 영국에서 역사화를 부활시키고 싶어했지만 실질적으로 상류 사회가 원하는 것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 벨라스케스의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와 비교해 보면, 벨라스케스가 질감과 색체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반면 그는 아이의 성격과 매력을 생생하게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 있어 레이놀즈의 호적수였던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와 달리 거장의 작품을 연구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둘의 관계는 카라치와 카라바조를 연상시킨다. <하버필드 양의 초상>을 보면 레이놀즈의 보다 작위적인 양식으로부터 게인즈버러의 참신하고 순사한 접근 방법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물체의 특성과 외양을 묘사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귀족풍의 섬세하고 몽상적인 로코코 양식에 밀렸던 프랑스에서는 이제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유행이 넘어갔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감사 기도>. 그는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이런 면에서 베르메르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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