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지금까지 비록 유행이 바뀌고 미술가들이 다른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어, 어떤 사람은 인물의 조화로운 배치에 관심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색채의 조화나 극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체로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똑같았으며 누구도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나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력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논쟁자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으며 또 그들이 선호했던 미술가들 간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심지어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번째 변화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건축가들은 팔라디오의 책에 나오는 규칙이 ‘올바른’ 양식을 보장해준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 관심을 가진다면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고딕 양식인 호메이스 월폴, 리처드 벤틀리와 존 츄트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당시 한 사람의 기벽으로 취급됐지만,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번째 징후였다. 또한 전통적 관례에 대한 의심과 고대 유적 발굴의 결과, 팔라디오의 책에 나오는 원칙이 실제 그리스 건축과 전혀 딴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월폴의 ‘고딕 복고’에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다. 존 패프워스 <첼튼엄의 도셋 하우스>.

아카데미라는 말 자체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림 지식은 더이상 장인에서 도제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처럼 가르쳐야햐는 하나의 과목이 되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과거의 걸작들의 연구하여 그들의 기교를 익히라고 재촉해야 했다. 하지만 미술이 번창하려면 왕립 기관에서 가르치는 것보다는 구매자들이 많은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옛 거장의 위대함을 강조하다 보니 후원자들이 당시 화가들에게 의뢰를 안 하고 거장의 작품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대책으로 처음엔 파리에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전시회에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 전시회에서는 화려하고 가식적인 것이 단순하고 진지한 것을 압도해버릴 위험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멜로드라마적 주제, 큰 규모, 요란한 색채 등에 유혹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몇 미술가들은 ‘관학적’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들과 소외당한 사람들 사이의 충돌이 그동안 미술이 발전해온 공통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

이러한 위기의 뚜렷한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적 주제, 고대 그리스 신화, 로마의 영웅 설화, 우의적 주제 등으로 주제가 국한되어 있었다. 이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부터 시사적 사건까지 자유롭게 선택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 로마 시민으로 자처했고 로마 풍의 장려한 취향이 그림에 반영되었다. 이런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였다. <암살당한 마라>. 암살당한 혁명 지도자인 마라를 엄숙하게 기념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조각을 연구해서 근육을 실감나게 표현했고, 잡다한 색채도 복잡한 단축법도 없는 단순성을 추구했다.

구태의연한 주제를 내팽개친 미술가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가 있다. <발코니의 사람들>에서 보듯 그는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는 평범한 어용 초상화 같지만 허양과 추악함, 탐욕을 낱낱히 드러냈다. 자기 후원자를 이렇게 묘사한 화가는 전무할 것이다. <거인>은 부식된 선뿐 아니라 그늘진 부분도 나타낼 수 있는 애쿼틴트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고야의 판화의 특이한 점은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인>과 같은 개인의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자유가 바로 전통의 단절의 가장 뚜렷한 결과이다.

이런 새로운 접근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예는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태고적부터 계신 이>.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창조자도 사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악몽 같은 분위기로 표현했다. 소묘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주제의 자유를 얻으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풍경화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J. M. W. 터너와 존 컨스터블이라는 두 영국 풍경화 화가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는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의 관계와 비슷하다. 터너는 레이놀즈처럼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목표는 클로드 로랭이었다.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그는 그림을 보다 눈에 띄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모든 효과를 잔뜩 동원했다. 웬만하면 망하기 쉽지만 놀라운 재능으로 해냈다. <눈보라 속의 증기선>에서는 그의 대담한 방식을 볼 수 있다. 그의 걸작들은 웅대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과 경쟁했던 터너와 달리 컨스터블에게 있어 전통은 단지 장애물이었다. 게인즈버러도 여전히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를 그렸는데 컨스터블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중요치 않았다. 당시 클로드를 모범으로 받다는 풍경화가들은 초보도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는 속임수를 많이 만들었다. 예컨대 전경의 인상적인 나무 한 그루가 화면 중앙에 펼쳐진 원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채색법도 따뜻한 색은 전경에 써야하고 배경은 연한 푸른 색으로 해야한다는 등이다. 컨스터블은 이런 것들을 경멸했다.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눈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나무 줄기의 습작>, <건초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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