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의 달성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이탈리아 사람들은 15세기를 ‘콰트로첸토(400년대)’, 16세기를 ‘친퀘첸토’라고 부른다. 친퀘첸토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 또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조토 시대에 이미 봤던 것처럼 도시들은 위대한 미술가들을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고, 이는 거장들이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 하는 큰 자극이 되었다. 북유럽에 비해 도시의 자유가 컸던 이탈리아에서 이런 자극이 더 강했고, 따라서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에 관심을 갖고, 인체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야심과 자부심을 갖게 된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수준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은 역시 후원자들의 명성에 대한 집착에 의해 해소되기 시작한다. 명예와 특권을 얻고자 하는 수많은 궁정들이 서로 화려한 작품 의뢰를 위해 경쟁을 했기 때문에 거장들은 어느 정도 조건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군주가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지만 이제 관계가 역전되었다.

이런 변화는 건축에서 두드러진다. 건축가들에게 이제 고전 시대의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그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신전과 개선문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에는 알베르티의 예에서 봤듯이 현실의 요구와의 절충이 필요했었다. 그러한 건축가들이 위대한 건물로 명성을 얻기 위해 전통과 편의성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유력한 후원자를 만났을 때는 정말 기념할 만한 순간이었다. 교황은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짓는 것을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맡겼다. 그는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리스 고전기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설계를 했다. 그러나 여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이 종교 개혁을 유발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했다. 대성당 건축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판 것 때문에 루터가 항의하게 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에서 태어나서,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수업을 받았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수천 페이지의 스케치와 노트를 보면 그의 정신 활동의 범위와 생산성에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는 책에서 얻는 지식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직접 확인한 것만 믿었다.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의 식당 홀의 벽화이다. 수도사들은 마치 벽 뒤로 실제로 홀이 길게 연결되어 있고 예수와 사도들이 실제로 만찬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얼마나 실제 같으냐가 다가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완벽하다. 이전 시대에 정확성과 구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업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성이나 소묘의 기법보다 진정으로 위대한 점은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생생하게 화면을 전개한 상상력이다.

<모나 리자>는 레오나르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은 그녀가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고 볼 때마다 달라 보인다. 그는 어떻게 이런 효과를 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콰트로첸토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 인물들이 어딘가 딱딱하고 인형 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화가의 지식이나 인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 있어 반 에이크 만큼 참을성 있었던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만테냐만큼 소묘법과 원근법에 대해 잘 알았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은 선대로, 세부는 세부대로 잘 모사하면 할수록 어딘가 살아있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전의 화가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는데, 예를 들어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에서 윤곽이 덜 딱딱해 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펄럭이는 의상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해결책은 레오나르도만이 발견했다. 바로 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 두는 것인데, ‘스푸마토’라고 한다. 다시 <모나 리자>를 보면 표정의 중요한 두 요소인 눈가와 입가에 스푸마토를 세심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나 리자의 양쪽 배경이 서로 연결이 안되는데, 이것 때문에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계속 달라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단지 교묘한 요술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손이나 주름잡힌 소매에서 두드러지는 완벽한 묘사 덕분에 상쇄된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3세살에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다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기 위해 공방을 나왔다. 그는 근육과 힘줄로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처럼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소묘하며 연구했다. 자연의 온갖 문제에 다 관심이 있었던 레오나르도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오직 이 인체의 비밀에만 몰두했다. 그는 엄청난 집중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어떤 자세나 동작도 아무 어려움 없이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채플 천장에 그림을 그릴 것을 주문하였다. 시스티나 채플 벽면은 전 세대의 거장들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년동안 혼자서 작업한 결과가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이다. 단순히 이것을 완성하는데 들었을 육체적 노동만 생각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적인 업적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천장에는 천지 창조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고, 온갖 자세의 예언자들과 무녀들이 등신대보다 큰 크기의 초인간적인 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도 부족한지 그림들 사이 경계 마다 또 수많은 인물상을 그려넣었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있어서 혼란스럽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리라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장식으로 생각하고 봐도 매우 조화롭고 짜임새가 명료하다. 인물들을 하나하나 보면, 어떤 자세든, 어떤 각도에서든지 그릴 수 있는 그의 솜씨를 느낄 수 있다. 또 힘찬 몸짓으로 창조를 하는 조물주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거장인지 증명해 준다. 이후 수십 세대 동안 하느님을 떠올릴 때 떠오르는 그 이미지는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파엘로 산티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경쟁하던 1504년에 피렌체로 왔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명성에 압도되지 않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 두 거장에 비해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성모상은 미켈란젤로의 조물주가 그랬듯이 후대들에게 진정한 성모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대공의 성모>를 보면, 성모의 얼굴,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애정어린 자세 등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 약간만 변경해도 균형이 깨질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긴장감이나 부자연스러움은 없고 마치 이것 이외에 다른 모습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요정 갈라테아>는 그 풍요롭고 복잡한 구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각 인물상은 서로 다른 인물상과 대응하며 또 다른 움직임은 제각기 그와 상반되는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때문에 후대 미술가들이 라파엘로를 그렇게 찬양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인체 묘사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 화가들이 그렇게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 하나 경탄할 만한 특징이 있다. 누가 <요정 갈라테아>를 보고 저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았냐고 묻자, 라파엘로는 특정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던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는 콰트로첸토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고대에는 도식적인 형태에서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 가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제 그 과정이 반전되었다. 머리 속에서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이상화’한 것이다. 미술가가 의도적으로 자연을 ‘개량’하려고 한다면 그의 작품은 틀에 박히거나 맥빠진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어쨌든 생명력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그의 명성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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