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나?

일본의 패망

단순하게 말하면 해방의 원인은 일본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절이 일본에서는 패전기념일이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과정

  • 1929년 시작된 미국발 금융대공황에 전세계가 휩쓸린다. 미국,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의 국가들은 어떻게든 견뎌 냈으나 독일, 일본 등 후진 자본주의 국가는 엄청난 체제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독일은 나치, 일본은 군국주의로 극복하려 한다. 군사적 대외 팽창은 시장 확대와 자원 확보 등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당시 만주는 중국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일본은 이 틈을 타 만주국을 건국해 버린다. 형식적으로 독립 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 1937년 드디어 중국 전체를 노리고 중일전쟁을 일으켜, 베이징,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싹 점령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체주의에 부정적이고 경제적 이권, 중국과의 관계 등이 얽힌 미국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 1938년 미국, 일본에 대한 전쟁 물자 수출 제한
  • 1939년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침공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하면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근데 의외로 독일이 강해서 프랑스가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 때를 노려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보유한 동남아로 진출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과의 통상 조약 파기하는 제제를 가한다.
  • 1940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군사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일본은 독일의 양해 아래 원래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 북부로 진출한다. 미국은 철강류 수출을 금지하는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
  • 1941년에 이르면 일본은 인도차이나 전체를 장악하고 영국 식민지까지 압박하게 된다. 미국은 최후의 경제적 카드인 석유 수출 금지를 단행하고 미국내 일본인 자산을 동결한다.
  • 1941년 11월 미국은 일본에 최후 통첩을 보낸다. 이것을 당시 국무장관 헐의 이름을 따 ‘헐 노트’라고 부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할 것
    2. 중국 영토 반환
    3. 삼국 군사동맹 파기
  •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한다. 석유 없인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내린 결단이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고 한순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킨다.
  • 1942년 전반기까지 일본은 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심지어 호주까지 노린다. 그러나 미국은 전국의 생산시설을 풀 가동해 순식간에 전력을 복구해 낸다.
  • 1942년 6월에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이 때부터 일본이 점령한 섬들을 하나 하나 되찾는 식으로 전쟁이 진행된다.
  • 1945년 8월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은 핵무기까지 맞고 나서야 결국 항복하게 된다.

일본의 역사 인식

일본은 자신들이 침략자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 하도 숨통을 조여와서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한 ‘자위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태평양 전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놓았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어떻게 압박을 가했고 일본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며 어떻게 전쟁을 시작했는가와 같은 것이다.

연합국의 독립 약속

그런데 일본의 패망이 한국의 독립과 무슨 상관인가? 사실 이 두 사건은 논리적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어렵다.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은 그냥 일본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일본이 망했으면 조선도 같이 망한 것이다. 바로 연합국의 독립 약속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기에 독립이 있을 수 있었다.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참여하여 전후 세계 질서 재편에 대한 논의를 한다. 그 결과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는데, 주로 중국 관련 내용인 가운데 한국 언급이 한 구절 들어간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주목할 점은 두 가지이다.

    1. 한국의 해방과 독립 결정
    2. ‘in due course’ – 바로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적절한 방법으로. 이것은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 1943년 12월 테헤란 회담에는 미국, 영국, 소련의 스탈린이 참여했다.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카이로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이 때 40년 정도 신탁통치를 하면 될 것 같다고 하였고 스탈린도 동의했다. 이것은 루즈벨트의 기본적 구상으로 국가들을 일시에 독립시키지 않고 미국 관리하에 자본주의 체계에 적응시키려는 의도였다. 스탈린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이 더 급하니까 일단 동의한 것이다.
  •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과 신탁통치를 확실하게 합의했다.
  •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는 루즈벨트가 사망하여 부통령 트루먼이 참여했고, 영국도 회담 기간 중 총선이 있어서 중간에 애틀리가 참여했다.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
  • 1945년 8월 일본 항복 후 약속대로 한국이 해방되었다.

우리의 역할

이렇듯 독립의 원인은 첫째, 일본이 패망해서, 둘째, 연합국이 독립을 약속해서이다. 이렇게 보면 독립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외부의 요인에 의해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로 보일 수 있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에 대한 문구는 왜 들어갔나?

연합국들이 착해서 넣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각 국가는 명확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저 문구는 먼저 중국이 강력히 주장하였고 영국은 반발하였다. 영국은 식민지가 가장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한국이 독립하면 자신의 식민지도 해방시켜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미국이 중재해서 해방을 시켜주는 대신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 이유는 중국과 독립운동 세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 수뇌부를 한번에 날려버리면서 그동안 중국에서 천대받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본과의 싸움에서 중국정부와 임시정부 사이에 긴밀한 협력 관계가 생기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1943년 7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개석을 만나서 연합국의 독립약속을 요청했고 장개석은 이를 수락했다.

이렇게 독립은 우리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00% 우리가 싸워서 얻어낸 것도 아니고 100% 우연히 주어진 선물도 아니다. 우리는 균형잡힌 역사 인식을 가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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